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민스키 여단 (문단 편집) === 소멸 === 카민스키가 처형되자 그의 부하들이 자기들 몫이라고 생각하고 공산당으로부터 해방시킨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을 감안해서 "러시아 해방 자금"이라는 이름으로 챙기려고 계획했던 약탈품들은 모조리 힘러에게 보내졌다. 카민스키의 부하들에게는 그가 폴란드 게릴라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는 거짓 해명이 전해졌으며, 부하들이 그 이야기를 믿지 않자 게슈타포는 카민스키의 차를 도랑에 처박은 다음 [[기관총]]을 갈기고 [[거위]] 피를 뿌려서 습격 현장을 조작했다. 그제야 사령관의 전사를 확신한 카민스키 여단은 빨치산 활동이 없는 북쪽으로 이동했다. 이후 카민스키 여단이 받았던 친위대 29사단의 사단번호는 회수되어 "[[무장친위대/부대일람#s-2.3.2|이탈리아 1사단]]"에 부여되었다. 여단의 잔존병력은 [[안드레이 블라소프]]의 [[러시아 해방군]]([[ROA]])에 일괄적으로 편입할 예정이었으나 러시아 해방군 쪽에서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러시아 해방군들도 점령지에서 패악질을 벌이는 이들이 싫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해방군 지도부 세르게이 부냐첸코 및 [[안드레이 블라소프]]는 카민스키 여단 인원들을 뷔르템베르크의 러시아인 수용소로 가는 도중 목격했는데, 그들이 목격한 러시아 국민해방군 집단들은 약탈한 드레스와 보석으로 휘감은 여자들을 대동한 채 군복을 입은 무장한 사람과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를 다 태운 마차 행렬을 이루는, 군대가 아닌 도적패와 더 가까운 외향에다 장교들은 양손에 시계를 줄줄이 차고 있었다.[* [[손목시계]] 약탈은 이들과 적대관계인 소련군 측에서도 자주 저지르던 범죄였다. 광복 이후 [[소련군정]] 지역에서 주둔한 소련군들이 점령지 민간인들의 손목시계를 자주 약탈해서 지역 주민들은 한 여름에도 긴팔 소매의 옷을 입어야 했고 [[베를린 공방전]]이 끝나고 시가지 한 목판에 소련 국기를 계양하는 사진에서 해당 군인이 팔에 손목시계를 하나 이상 감고 있는 것이 찍히자, 이미지가 실추될 것이 우려된 소련군 지도부가 사진을 수정한 해프닝도 있었다.] 이 꼬락서니를 보고 기가 막힌 [[세르게이 부냐첸코]]는 '''"[[나치 독일군|당신들이]] 내게 주는 것이 이 비적, 강도, 도둑 떼입니까?"'''하고 따지기도 했다. 카민스키 여단의 이미지는 위의 인용문처럼 답이 없는 수준이었고, 블라소프는 결국 자기가 실시한 세심한 시험을 통과한 2천 명 정도만 자기 부대에 받아들였다. 이때까지 이들을 따라온 민간인들과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병사들은 나이세 선 방어선 구축에 노동자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렇게 카민스키 여단은 소멸된다. 이후 잔존 병력은 [[러시아 해방군]]에 흡수되었고, 이에 가담한 사람들은 [[러시아 해방군]]의 소멸과 함께 소련에 체포되어 반역자로 처단당했으며, 노동자가 된 사람들도 독일군의 거친 대접과 함께 전후 소련에서 뻗어온 추적 때문에 운좋게 빠져나가서 신분을 숨기고 사는 몇몇 사람들을 빼고는 처단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